무협에서 은자 1냥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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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김. 결론만 원하면 맨 끝 부분만 읽기 바람)

중세 중국에서 은자 1냥의 가치는 얼마일까? 같은 은자 1냥이라도 시대 별로 다르다. 한국의 경우 1950년과 2020년의 1원의 가치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누구는 10원이면 짜장면 한 그릇이라고 말할 것이고, 누구는 100원, 1000원, 10,000원에 짜장면 한 그릇이라고 말할 것이다. 1950, 1970, 1990, 2020년 중 어느 시기를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1원의 가치는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명나라 초기와 중기 말기, 청나라 초기와 말기의 은자 1냥의 가치는 다 다를 것이다. 명나라의 경우 어느 때는 은자 1냥이 쌀 2섬이고, 어느 때는 4섬이고, 풍년이 들 때는 은자 1냥으로 쌀 8섬을 살 수도 있었다.

해마다 은자 가치가 다르니 은자 1냥을 정확하게 고증해서 쓰기는 어렵다. 하지만 글을 쓰기 위해서는 편의상 글 속의 은자 1냥에 대한 가치를 정해놓고 써야 한다. 이를 위해 몇 가지 기초 사실을 알아보자.


(1) 은자(=은정)와 은원보, 은화의 구분

1. 서양은 은으로 만든 돈, 법정화인 은화를 만들어 사용했다. 하지만 중국은 은화를 만들지 않았다.(청나라 말기 광서제 때 서양주조법을 도입해 은원을 만든다) 따라서 청나라 중기 이전 시기를 다룬 글에서는 은화라는 낱말을 쓰면 안 된다.

2. 은자라고 부르는 것은 조선의 상평통보처럼 동전 모양이 아니라 은 덩어리를 대충 잘라서 쓴 조각을 말한다. 큰 은 덩어리에서 잘라낸 작은 은 덩어리를 은정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을 은자라고 불렀다. 모양은 불규칙하고 제각각이다.

3. 당연히 정해진 모양이 없는 은자는 무게를 달아서 동전과 교환했다. 실제로 은자로 대금을 지불하면 천칭저울로 무게를 달아서 무게를 확인하는 과정부터 거쳐야 한다.(이를 위해 상인들은 주머니 안에 들어가는 작은 저울을 갖고 다녔다.) 당연히 일반 식당에서는 은자로 음식 먹는 것이 어렵다. 객잔과 상점에서는 동전을 사용했다.

은자 1냥은 36g 전후인데, 오늘날 금 한 냥(금 열 돈)이 37.5g이니 대충 금 한 냥의 무게가 은자 1냥의 무게라고 보면 된다.

4. 은원보는 고대부터 사용된 큰은정(大銀錠)를 가리키는 말이다. 수나라 당나라 때는 은병, 은홀이라고 불렀고, 송나라 금나라 때는 은정이라고 불렀으며,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때는 원보(元寶)라고 불렀다.
명나라 만력제 때 장거정이라는 재상이 일조편법이라는 세금제도를 위해 현물납부나 동전납부였던 세금납부를 은으로 납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다시 도입한 통화방식이 ‘원보’다. 은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은원보’라고 부른다. 금으로 만든 것은 금원보라고 부른다.
말안장 모양의 은원보는 금나라에서 만들었으며, 명나라 때 다시 도입된다.

은원보 1개는 은자 50냥의 무게다.


(2) 중국의 화폐 단위

조선은 상평통보 같은 국가에서 지정한 법화가 존재했다. 상평통보의 경우 1문, 2문, 5문, 100문 짜리가 발행되었고, 10문이 1전, 10전이 1냥, 10냥이 1관, 400문이 은 1냥이라는 단위의 기준이 있었고 은 1냥과 고정시켰다.

상평통보 1관=1000문=100전=10냥
상평통보 400문=은 1냥

그런데 중국에서는 통화정책 실패로 동전, 지폐로 발행된 많은 통화가 문제를 일으켰다. 특히 교초라는 지폐의 가치가 크게 하락하는 문제로 인해 지폐가 아닌 은을 안전자산으로 선호했다.(현대에서 금을 안전자산으로 선호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장거정이 은원보를 만든 것이다.

은자 1냥의 교환가치는 동전 몇 백문인 경우도 있고, 동전 2천문을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시대에 따라 은자 1냥과 동전의 교환비는 달랐다. 마찬가지로 은자와 금의 교환비율도 시대마다 달랐다. 어느 때는 금1냥이 은 10냥이기도 했고, 어느 때는 은 20냥이기도 했다. 실제 교환비는 1 : 15로 은자 15냥이 금 1냥에 가깝지만, 보통은 교환비 기준을 1 : 20으로 잡고 은자 20냥을 금 1냥으로 잡는다.

보다 못 한 숭정제가 동전 1,000문을 은자 1냥에 고정하는 화폐 정비를 시도한 적이 있다.

보통 우리가 은자 1냥을 동전 1,000문이라고 말하는 기준은 숭정제의 화폐정비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러니 은자1냥=동전1천문 으로 기준을 삼으면 된다.

이제 이 기준으로 명나라의 화폐 단위를 살펴보자.

거지들이 ‘한 푼만 줍쇼’ 할 때의 한 푼이 동전 1문(푼)을 말하는 것이다. 화폐의 최소 단위가 1문(푼)이다.

이 동전 1,000개가 모이면 은자 1냥이다. 또는 동전 1관이다.

은자 1냥 = 동전 1,000문(푼) = 동전 1관

그리고

은자 20냥이 금 1냥이고,
은자 50냥이 말안장 모양 은원보 1개라고 알자.

은자 50냥 = 은원보 1개 = 금자 2.5개


(3) 은자 1냥의 가치

은원보가 만들어진 만력제 당시를 기준으로 하면 다음과 같다.

은 1냥 = 쌀 2섬(189kg) = 어지간한 월급쟁이 1달 월급

쌀로 계산하면 아래와 같다.

쌀 무게를 재는 단위로
1석=10말(두)=100되(승)=1,000홉(합) 이니까

은자1냥은 2섬(석) = 20두(말) = 200승(되) = 2,000합(홉)

그러므로

동전1문은 쌀 2홉,
동전10문은 2되,
동전100문은 2말
동전1000문은 쌀2석(2가마니)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명나라에서 은자 1냥은 좀 번다는 직업의 1달 월급이다. 고급 관리 월급이 은자 2냥이다.
하급 직종이면 한 달 월급이 500문이다.

그러니 은자 1냥을 현대 가치로 환산하려면 지금 시점 기준으로 그 나라의 한 달 월급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된다. (현재 한국 기준으로 은자 1냥을 쌀을 기준으로 삼으면 50만원, 월급을 기준으로 삼으면 300만 원에 가깝다)


(4) 은자의 가치 비교

은자 1만 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몽골의 지폐 발행을 보면 알 수 있다. 야율초재가 몽골 황제인 오고타이 칸에게 제안해 발행한 몽골국 전체의 지폐가 은 1만정(1만냥)이다. 은 1만 냥이면 원나라 초기 국가 전체의 지폐와 같은 양이다.(나중에 이 지폐 가치 하락이 원나라 패망의 주요 원인이 된다)

1. 몽골 오고타이 칸이 발행한 전체 지폐의 양이 은 1만 냥
2. 명나라 만력제 때 국고 수입이 1년 200만 냥
3. 조선의 1년 예산이 은자 30만 냥.
4. 조선후기 노비의 몸값은 10냥. 10냥만 있으면 노비 1명을 평생 고용할 수 있었다.

조선 전체 예산이 30만 냥이다. 그 중 20만 냥을 지자체에 나누어 주었다면
광역지자체인 경기도 예산은 2만 냥 정도 되었을 것이고,
2만 냥을 다시 산하 수십 개 군에게 나누어 주었다면,
경기도 밑의 안산군, 이천군은 예산이 몇 백냥 수준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은자 몇 백 냥, 몇 천 냥은 상상이 안 되는 엄청난 돈이다.
몽골 전체 발행된 지폐의 총액이 1만 냥임을 생각해보라.

실제로 백성들은 은자 자체를 사용할 기회 자체가 없었다고 보면 되고,
은자로 물건을 거래하는 일 자체가 없었다고 보면 된다.
대개는 현물 물물교환이거나 동전을 이용했다.


(5) 결론

1. 글을 쓸 때 은자 1냥 = 동전 1,000문 = 중산층 1달 월급으로 잡고 쓰면 된다.
2. 객잔이나 상점에서는 동전만 쓰는 것으로 묘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