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설에는 남송말기 홍요군(紅袄軍)의 수령인 이전(李全)의 처인 양묘진(楊妙眞)이 만들었다고 한다. 이는 '송사. 이전전'에 나온다. 힘이 약한 여인이 창을 다룰 수 있는 이유는 7로창법(7路槍法)이라 가능한 것이며, 당연히 정교함은 떨어져 무적의 창법은 아니었다고 한다.
보경2년(寶慶2年, 1226), 이전은 청주에서 몽고군에게 포위당하고 마침내 적에게 항복을 선택한다. 이후 그는 남송을 공격하다가 패하고 전사한다. 이 소식을 들은 양묘진은 대세가 기울었음을 알고 다음과 같은 문장을 남긴다.
“이십년이화창, 천하의 무적이었으나, 이제 모든 것이 끝났으니, 다시 돌아가지 못 하리.” - [송사기사본말(宋史記事本末) 卷八十七]
양묘진이 이전과 협력하여 만든 양가창은 이후 이백년 뒤 명나라 시기에 가장 널리 전파되고, 영향이 가장 큰 무술유파가 되었다.
척계광은 [기효신서(纪效新书)] '장병단용설편' 에서 "창법의 시작은 양씨에서 시작되었으니, 이를 일컬어 이화라고 부른다. 양가창은 변화막측하고, 조화무궁하며, 천하가 모두 숭상한다."고 적었으며, 유대유는 [검경]에서 "산동, 하남의 각 처의 무술교사는 양가창법을 전했다", 오수는 [수비록]에서 "명청 양대에 이미 무림에 이름이 높고 존중받았다. 양가창이 고금에 이름을 날린 것의 원인을 따져보면, 바로 그것이 비교적 일찍 계통적으로 완비된 창법이론과 정묘한 실용창법체계를 형성했다는 것때문이다."로 적었다.
양가창의 특징은 ‘속도’에 있다고 한다. 허실을 겸비하고, 강유를 갖추어, 초식을 펼칠 때 날카로움을 막을 수가 없다고 한다. 특히 양가창의 장점 중 하나는 일단 공격이 성공한 후, 기세를 타서 공격하면 적이 다시는 일어날 기회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양가창은 양가육합팔모창법(楊家六合八母槍法)이라고 부르는데, 양가창의 육합의 기법과 팔모의 기법을 싣고 있기 때문이다.
‘팔모(八母)’의 기법은 창법의 여덟가지 기본 동작을 말한다. 여덟개의 모태가 되는 기술이라 하여 팔모라고 부른다.
[팔모(八母)] - 권리고창(圏裏高槍) - 권리저창(圏裏低槍) - 권리창(圏裏槍) - 권외고창(圏外高槍) - 권외저창(圏外低槍) - 권외창(圏外槍) - 환창(澋槍) - 흘창(吃槍)
육합창은 일합(一合)에서 육합(六合) 까지의 여섯가지 합(변식, 연계식)을 이른다.
[육합창(六合槍)] - 일합(一合) : 진왕마기(秦王磨旗) - 이합(二合) : 봉점두(鳳點頭) - 삼합(三合) : 백사농풍(白蛇弄風) - 사합(四合) : 철소추(鐵掃箒) - 오합(五合) : 발초심사(撥草尋蛇) - 육합(六合) : 일절(一戟), 이진(二進), 삼란(三攔), 사전(四纏), 오나(五拏), 육직(六直)의 연계를 말한다.
축기술(蓄氣術) : 심법(心法), 신공(神功) 등
무기술(武器術) : 검법(劍法), 도법(刀法), 창법(槍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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