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서 문장형 제목의 역사는 꽤 오래 되었다.
[로빈슨크루소]의 원제는 [조난을 당해 모든 선원이 사망하고 자신은 아메리카 대륙 오리노코 강 가까운 무인도 해변에서 28년 동안 홀로 살다 마침내 기적적으로 해적선에 구출된 요크 출신 뱃사람 로빈슨 크루소가 그려낸 자신의 생애와 기이하고도 놀라운 모험 이야기]다.
[걸리버여행기]의 원제는 [세계의 여러 외딴 나라로의 여행기. 네 개의 이야기. 처음에는 외과 의사이다 여러 배의 선장이 된 레뮤엘 걸리버 지음]이다.
무궁과 꽃이 피었습니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 한다,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 등등. 1990년대 베스트셀러 제목 상당수가 문장형이다.
한국식 문장형 제목과 외국식 문장형 제목의 차이는 길이와 서술의 내용이다.
[로빈슨크루소]나 [걸리버여행기]는 장문이고, 복문이다.
서술형 장문에 소설 내용을 모두 담고 있다.
이런 긴 장문제목은 일본 라노벨에서도 나타난다.
일본 라노벨사이트의 Top5 제목은 아래와 같다.

일본 웹소설, 라노벨의 제목을 보면 [로빈슨크루소]식 서술형 장문이다.
일본 라노벨 제목이 길어진 이유는 시스템적인 이유가 크다.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 소설의 내용을 제목에 담기 시작했는데, 긴 제목도 사이트에서 모두 노출시켰다. 그러다 보니 제목이 길어지는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반면 한국은 시스템적 허용이 안 되기 때문에 일본식제목처럼 갈 수가 없었다. 문피아를 예를 들면 좌측 사이드바에 표시되는 제목은 한글 8글자 전후고 투베목록에 표시되는 것은 10글자 전후에 불과하다. 그 이후 제목은 ‘...’으로 표시된다.


그렇기 때문에 문피아에서는 장문형 제목이 불리하다.
가능한 8~10자 안에 핵심을 넣어야 하고, 그러다보니 중요한 키워드를 앞에 넣게 된다.
‘친구와 바람이 난 아내에게 이혼 당하고 버림받은 헌터가 각성을 해서 국가권력급 힘을 얻자 S급 스타미녀헌터가 접근해서 새로운 연인으로 사랑을 나누게 되는 이야기’와 같은 서술식 장문형 제목을 쓰지 않는다. 주요 키워드가 ‘국가권력급’이면 이 키워드를 선두에 배치한 단문형으로 쓴다. ‘국가권력급 헌터로 이혼 후 각성함’ 같은 식으로 쓴다.
이런 이유로 문장형 제목이라 하더라도 한국식 문장형 제목은 일본과는 결이 다른 형태의 문장형 제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문장형 제목이 일본 라노벨의 영향이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영향을 일부 받은 것은 맞지만 전적으로 일본 라노벨의 영향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두 나라의 문화도 다르지만 시스템부터 달랐기 때문이다.
일본 라노벨식 제목은 애초부터 한국의 시스템에 적용이 불가능한 제목인 것이다.
시리즈 Top의 제목을 보면 [회장님, 신점 보시려면 줄부터 서세요 ] [회귀한 환경공학자가 돈을 복사함] [능력 강탈로 빌런들 스킬 전부 압수] [삭풍이 불어오면] [김택서 복수일지] [나 혼자 마법사인데 탑 등반]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와 같이 대개 핵심 키워드를 조합한 짧은 단문형 문장이다.
[프롤로그에서 30년이 흘렀다]는 [서른 잔치는 끝났다]와 비슷하고, [삭풍이 불어오면]은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와 비슷하고, [나 혼자 마법사인데 탑 등반]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와 비슷하고, [회귀한 환경공학자가 돈을 복사함]은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과 비슷하다.
키워드 배열이나 길이가 90년대 종이소설과 비슷하다. 심지어 제목이 주는 메시지마저 비슷하다.
문장의 형태도 핵심 키워드 몇 개로 된 단문형이라는 점에서 본문설명식 일본 소설 제목과는 구성형태가 다르다.
상업적인 것은 이런저런 것에 영향을 받아 좀 더 나은 방법을 찾아내는 변증법적 발전을 하기 마련이다. 한국 웹소설의 문장형 제목은 이런저런 제목을 가져다 사용한 결과 발전한 형태다. 일본 라노벨의 제목도 가져다 썼겠지만, 그 영향력은 전적인 것이 아니라 일부라 할 수 있다.
노벨피아의 경우 수백 글자 제목이 가능한데도, Top100을 보면 여전히 단문형 한국식 제목이 대부분이다. 제목이 긴 작품들이 꽤 있었지만 베스트에 오르지는 못 했다.
시스템적으로 지원이 가능한 곳에서도 라노벨의 서술형 장문제목이 힘을 쓰지 못 하는 이유는 한국 독자의 정서에 아직은 100자나 되는 서술식 장문제목이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히려 일본 라노벨의 제목이 영향을 준 쪽은 서술형 장문이라는 형식보다는 제목의 뉘앙스 쪽이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전생했더니 슬라임이었던 건에 대하여]는 ‘~했더니 ~인 건데 대하여’나 ‘~인 건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유행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문피아에 ‘전생’으로 시작해서 ‘~인 건에 대하여’로 끝나는 제목은 꽤 된다.
‘Re: 제로부터 시작하는 이세계 생활’의 경우, ‘~부터 시작하는 ~XX’이라는 형태의 제목 유행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형태의 제목 역시 문피아에 꽤 많이 존재한다.
일본 라노벨 제목이 한국에 준 영향은 서술형장문이라는 형식보다는, 키워드의 배열을 통한 뉘앙스 전달 쪽에 좀 더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살펴본 것처럼 현재 한국 웹소설의 문장형 제목은 100자가 넘어가는 일본 라노벨 제목과는 다른 한국식 제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웹소설의 변증법적 발전 과정 중에 일본 라노벨 제목의 장점을 당연히 흡수할 수밖에 없고, 그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필요한 부분을 잘 흡수해 한국식 제목으로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 예로 든 시리즈베스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현재 시리즈, 문피아, 노벨피아 Top10을 보면 일본식 라노벨보다는 90년대 한국소설의 제목과 비슷하다. 아무래도 이런 형식이 더 한국 독자에게 잘 맞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90년대에 베스트셀러로 익숙해진 형태라 지금도 저런 형태의 한국식 문장형 제목이 웹소설 Top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독자의 취향이 바뀌고 시스템이 바뀌면 한국에서도 100자 넘는 긴 제목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스템이 바뀐다 해도 한국의 독자들 입맛을 고려한다면 9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키워드형 단문형 문장식 제목이 계속 상위권을 차지할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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